제2장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의 역사적 고찰


1절 초대 한국 교회가 처한 시대적 상황


1. 구한말의 시대적 상황


가. 시대적 개관

  기독교가 이 땅에 선교의 문을 열기 시작한 때는 조선 왕조가 외세에 못 이겨서 몰락(沒落) 과정에 있을 때였다.

  (1876년 강화수호조약이후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1882년 5월 미국과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었으며, 1882년 6월에는 조영수호 통상조약이 제물포에서 체결되었고, 같은해 6월에 독일과도 수호조약을 맺었고, 1884년 6월에는 러시아와 1886년에는 프랑스와 조약을 맺음으로 조선은 구미 제국에 널리 문호를 개방하였다.)

  문호의 개방으로 외세에 위기의식이 짙어지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론 근대적 제도, 서양의 기술을 섭취(攝取), 채용해야겠다는 개화신조가 더욱 고조 되었다. 

  내부적으론 개화(開化)와 수구 두 세력이 대원군과 민비의 대립에 얽혀서 정계는 혼란을 빚어지게 되었다.

  경제적으론 국가의 재정적인 궁핍이 심하였다. 그로인해 농민의 세금이 증가되므로 양반 관료에 대한 불평이 높았으며, 민란이 자주 일어났다. 


나. 종교적 상황

  한국의 역사를 통해 한 대 전성했던 선이나 불교나 유교의 정신적 차원이 고갈되고 그 형식과 명분만으로 무게 없는 반복만 되풀이 하던, 종교적 신앙과 정신생활의 전례없는 진공기로 근대 한국은 종교적 생활에서 심한 허탈감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때에 유교는 현실적인 윤리기강의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종교적 국면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었다. 그리고 불교는 너무 신비주의에 흘러 한국인의 정신에서 소외되었다.

  그러므로 근대 한국은 새 종교에 대한 일종의 갈망이 현상적으로 널리 펴져있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68. 1993)

  내외의 관찰자들에게 한국은 비종교적인 인상을 짙게 풍기었다.  1953년 하멜(Hendrik Hamel)은 한국은 아무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면서 “이들은 종교에 관하여 전혀 논란하지 않는다”고 평한 일이 있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69. 1993)  

  외형적인 종교의 부재와 함께 국내외 혼란이 곁들여 있었다. 운양호를 몰고온 일본과 1876년 2월 26일 강화 조약을 체결한 이후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와 같은 구미 제국과 수호 조약을 맺음으로 은둔국의 고립은 세계 무대앞에 깨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황막한 새 정세의 전개에, 기댈 곳이 없는 서러움을 안은 둣한 모습이었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트가 선교되기 직전의 근대 한국의 모습이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70. 1993)  



2. 복음의 수용


가. 선교사들의 선교이전 시대


  한국은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카톨릭을 통해 들어와 있었다.

   1866년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B.A)가 대동강변에서 순교하므로 한국 초최의 순교자가 되었다.

  토마스는 북경에서 조선인 동지사(冬至使-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를 만나, 조선 내에 카톨릭의 수난을 알게 되었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중국 만주 주재원인 월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의 주선으로 1865년 9월 4일 중국 지프를 떠나 조선 서해안 자라리에 도착했다. 거기서 카톨릭 교인과 접촉을 하여 우리말 지식을 습득하면서 성서를 나누어 주었다.

  그는 서울에 가서 전도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작은 범선을 타고 한강을 향했지만, 심한 폭풍을 만나 구사일생로 만주 피즈우에 표류하여 북경으로 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 갈 것을 결심하고 1866년 한국이 필요하리라는 상품을 실고, 통상 개시의 유무를 시탐하기 위하여 파견된 무장한 미국 상선 제너널 서먼호를 타고 한국을 향하였다.

  이 상선이 대동강 입구에 들어서자 평안도 감사가 문정서를 보내어 온 까닭을 묻자 한국과 통상을 개시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자 감사는 크게 놀라 거절을 하였다. 그러나 이 상선은 대동강을 따라 평양시까지 올라갔다가 때마침 내린 홍수와 바닷물의 만조로 사주(沙柱)를 넘어왔다가 물이 빠지자, 배가 모래와 진흙 속에 빠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한국 병사의 포화에 배는 불타게 되었고, 토마스 목사도 다른 일행과 함께 살해 되었다.(백 낙준 한국 개신교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9. P48)

그러나 개척 선교사의 한 사람인 모페트(Samuel A. Moffett) 목사에 의하면 1893년 11월에 학습 교인반을 조직 할 때에, 토마스 목사에게 중국어 신약 성서를 받은 사람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초기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구도자(求道者)적인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이 땅에 기독교를 받아드리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신앙을 지켜왔던 것이다.



나. 초기 선교사들의 내한


   실제로 한국 최초의 선교사는 북미 장로교의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이라는 의사였다. 알렌은 갑신정변 우정국 사건 때에 개혁파에 칼에 맞은 보수파의 중추인 민 영익을 치료해 주므로 그 의술을 인정받아 왕실부 시의관으로 임명을 받게 되었고, 고종과 민비에 총애를 받게 되었고, 미국인에 대한 인상이 우호적으로 남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미국 선교사의 전도에 밝은 전망을 보여 주게 되었다.

  1885년 4월 5일에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부처 세 사람이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한달후인 5월 3일 감리교 월리암 스크랜턴(Wm B. Scranton)과 그의 모친 스크랜튼(Mrs. M. F. Scranton) 여사가 함께 입국하였다.  


다. 선교의 운허 과정


  1990년 이후 갑신정변, 동학란, 청일전쟁, 갑오경장을 한국 사회는 일대 변동을 겪게 되었다. 이때부터 개화기의 학술지나 언어지에서는 유교사상의 극복을 위한 철저한 유교 비판의 소리가 높아갔고, 기독교에 대하여는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유교나 불교를 신봉하는 개화파 인사들마저도 기독교야 말로 쇠약해 져가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고, 선교 단체들은 곧 개화의 힘이 될 것이라 공헌하게 되었다.(심 일섭 “한말사상과 기독교에 수용과정에 관한 연구” (신학 사상) 제28집 (서울 신학 연구소  1980) p.171

  그러나 고종은 종교의 전파는 허락지 않았고, 기독교는 금교되고 있었다.      

그후 조선 정부는 1898년 6월 10일에 스왈론 선교사에게  호조 (護照;외국인에게 내주던 여행권)를 발행함으로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 젤러 목사가 입국한지 13년만에 선교의 윤허가 내려 졌다. 이로 인하여 선교의 자유가 부여되었다.



3. 초기 선교 정책과 대 부흥 운동


가. 초기 선교 정책


1). 장로교 정책

  

  미국의 감리교와 장로교를 비롯해서 캐나다, 호주, 영국 그리고 간접으로 일본을 통하여 새 선교지 한국에 여러 계층의 선교사들이 몰려들고 아울러 한국 교회 내에 간혈적인 수난도 있고 하여, 뚜렷한 선교 방법의 설정을 서두르고 피차 경쟁하는 잘못을 피하는 방법을 구하며, 더 나아가 한국교회 수난에 대용할 선교사들의 입장을 밝히는 정책 설정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국 주재 선교사들의 초청에 의해 1890년 존 네비우스 박사(Dr. John Nevius)가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그들은 네비우스 박사의 저서≪선교 사업의 방법≫(Methods of Mission Work)에 제시된 원리에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7명의 젊은 장로교 선교사들을 데리고 두 주일 동안 체류하게 된 그의 한국 방문은 선교정책에 직접적이고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선교사들의 하나하나의 복음 전도와 광범위한 순회 전도

  (2) 자립 선교

  (3) 자립 정치

  (4) 자립 보급

  (5) 체계적인 성서 연구와 모든 활동에 거의 성서의 중심성을  관철하다.

  (6) 성서의 교훈에 따라서 엄격한 생활훈련과 처리를 한다.

  (7) 다른 교회나 기관과 협력 및 일치의 노력을 계속하며, 최소한도 다른 기관과는 지역을 피차 뜻에 맞게 분활하여 전도한다.

  (8) 지역과 프로그램 분활 이후에는 피차 절대 간섭은 하지 않 는다.

  (9) 그러나 경제나 그 이외의 문제에 있어서는 항상 넓게 피차  돕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대개 요약된 그 원칙이다.  강력한 자립성과 광범위한 순회선교, 성서에 대한 압도적인 강조가 그 기초였다.  그러나 또 한가지 이 원칙의 핵심에서 차세적 생활과 의무에서의 둔퇴(遁退)가 종교의 본분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평범한 통상의 생활을 하면서 교리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의 참 모습이라고 설파하는 정신도 깔려있었다.

 

2). 감리교의 선교정책


  감리교는 장로교의 경우처럼 도식화된 문서상의 일정한 정책 규정이 따로 없기 때문에 그 윤곽을 더듬어 살펴볼 수밖에 없다.  감리교는 탐색, 순회전도를 원칙으로 했다.  이것은 실제로는 장로교와 별 차이가 없는 정책이었으나 이러한 방법이 옛적 감리교 전도사들과 부흥사들의 순회전도와 꼭 같았기 때문에 감리교의 생리에 들어맞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감리교는 교육분야의 있어서 장로교의 경우보다 훨씬 차원 깊은 집착을 하였다.  아펜젤러는 한국에 온 지 꼭 넉 달만에 두 사람의 학생을 가지고 학교를 시작했던 것이다.  장로교가 젊은이들을 교육해서 후에 각각 출신 교회로 보내어 힘있는 전도자적 크리스챤을 양성 힘을 최후의 목적으로 삼았는데 반해서,  감리교는 교육 일반에 주력함으로써, 그것으로 복음전도의 한 수단으로 삼는 폭넓은 방법을 원용하고 있었다.  두 교회는 이 교육 정책에 있어서 후에 그 간격을 더 넓혀갔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에의 치중은 복음사업의 부진을 자초할 수박에 없었다.


 

   나. 교회의 폭발적 증가와 부흥운동

   1895년과 1896년에는 교회의 세례교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없는 놀라운 성장의 시작을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선교사들도 역시 이 놀라운 성장의 대해서 알고 격려를 받고 있었다.  서울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한국의 실정은 변해 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오랫동안 무관심하던 백성들은 이제 각성의 징조를 나타내는 것같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895년에 평양으로부터의 연례보고에 의하면 “평양에서의 활동은 이제 개척 전도의 단계를 지나서 확고한 기반을 닦기 위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교회는 발전하고 팽창하기 시작하였으며, 평양과 그 변두리 지방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한 요인으로 자신을 자각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는 계속해서 이와 같은 놀라운 성장의 주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세례교인과 초신자들이 모두 열렬한 복음전도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전도활동을 하고 우리 선교사들은 그들의 활동을 뒷받침해 주어야 했다.”  이처럼 초창기에 벌써 교회는 선교사들보다 앞장을 섰는데, 선교사들은 초인간적인 노력으로 세례 지원자들을 가르치며 신앙이 약한 자들을 훈련시킴으로써 “후원”의 책임을 충분히 감당하였다.

   1900년 한 해 동안에 세례교인수는 3할 이상이나 증가되었다. 사람들은 놀라운 수효로 교회에 몰려들었으므로 선교본부의 연례 보고가 “이 사람들이 너무 빨리 증가되고 있지나 않은가?” 하고 반문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재빠른 성장은 아무런 영적 근거도 없이 수효만 많이 모아놓은 것이었던가? 여러 가지 증거는 그것이 영적 근거 위에 확고하게 기초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 당시의 선교사들이 주께로부터 받은 위대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헌신했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많은 수효를 모아놓는 데만 유혹을 받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교회 공동체와 세례교인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신자들”(adherevts)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 “공동체”(Community)라는 말은 주한 장로교 선교사회(Presbyterian Council of Mission In Korea)의 정의에 의하면 세례교인,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이, 학습 과정의 구도자, 정기적인 출석자,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옛 생활로부터 떠나 기독교의 감화 밑에 있는 또는 그 밖의 사람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며, “세례교인들”(Communicants)이라는 말은 교회의 기둥이 되는 세례 받은 성인 신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급속도로 성장하는 교회에는 교회 공동체와 세례교인과의 비율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만일 어느 한 해 동안에 교회 공동체는 크게 늘어났는데  세례교인수는 조금밖에 늘지 않았다면 그것은 양적으로만 크게 늘어나고 새로운 신자들의 훈련은 빈약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교회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100퍼센트 완전한 교인으로 만들 수 있는 교회는 없지만,  초기의 주한 선교사들은 훈련시키는 소임을 훌륭하게 감당하였던 것이다.

  1898년에는 교회 공동체와 세례교인과의 비율이 36 : 1이었다.  1907년부터 1942년까지의 평균 비율은 2.6 : 1이었는데, 이것은 한 사람의 세례인이 매주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모든 비기독교적 종교 행사를 걷어치운, 그러나 아직도 완전한 신자로 인정될 만큼 충분히 훈련을 받지 않은 다른 2.6 사람에 해당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초기 선교시대는 앞으로 올 놀라운 영적인 대 부흥을 위한 태동의 시기였다.

  앞서 말한 놀라운 성장이 영적 근거 위에 기초해 있었다는 더욱더 신빙할 만한 증거는 급속도로 성장하는 한국 교회로부터 “1907년의 대부흥”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이 대 부흥은 전혀 영적 근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서술되어왔다.